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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끝까지 읽지 않는 게 더 많이 읽는 방법이다

December 7, 2023

learningproductivity

1년 전까지 나는 책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서점에서 책을 사면 1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대부분 중간에 포기했다. 2장까지 읽고 책상 위에 올려두고, 먼지가 쌓이고, 죄책감이 쌓이고, 결국 새 책을 사는 사이클을 반복했다. 기술 서적만 8권이 책장에 꽂혀 있었는데 완독한 건 하나도 없었다. 책장이 성취하지 못한 목표의 전시관 같았다.

그러다 독서법 자체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든 계기가 있었다.

한 블로거의 독서법이 충격이었다#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의 사이트를 우연히 발견했다. 읽은 책마다 1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기고, 핵심 노트를 공개해두고 있었다. 놀라운 건 양이었다. 수백 권의 노트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점수 분포를 보니 10점 만점인 책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대부분 6~8점이었고, 5점 이하도 꽤 있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 진짜 많이 읽네" 정도로 넘어갔는데, 노트를 자세히 보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점수가 낮은 책의 노트가 극도로 짧았다. "한두 가지 인사이트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깊이가 없다" 같은 코멘트와 함께 핵심 문장 2~3개만 적혀 있었다. 반면 10점짜리 책은 노트가 엄청나게 길었고, "여러 번 다시 읽었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이 사람의 독서법은 이랬다. 모든 책을 같은 비중으로 읽지 않는다. 별로인 책은 핵심만 뽑고 빠르게 넘기고, 좋은 책은 여러 번 깊게 읽는다. 전체 독서 시간은 동일한데, 그 시간을 배분하는 방식이 달랐다. 10권을 골고루 읽는 게 아니라, 2권은 깊게 읽고 나머지 8권은 훑는 거다.

이게 내 독서법과 정반대였다. 나는 한 권을 잡으면 끝까지 읽으려고 했다. 재미없어도, 도움이 안 돼도, "이미 여기까지 읽었으니까"라는 매몰비용의 오류에 빠져서 끝까지 가려고 했다. 그리고 끝까지 못 가면 실패한 거라고 느꼈다.

완독이 목표가 되면 읽기를 멈추게 된다#

이 원리를 깨닫고 나서 내 독서 실패 패턴이 선명하게 보였다.

HTTP 완벽 가이드. 700페이지짜리 레퍼런스 책을 소설처럼 1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3장까지 읽고 포기했다. 사전을 A부터 Z까지 읽는 사람은 없는데, 나는 그걸 하고 있었다.

리팩터링. 서론부터 꼼꼼하게 읽다가 이미 아는 내용이 반복되는 구간에서 지쳐 멈췄다. 당장 필요한 12장의 리팩토링 카탈로그만 먼저 읽었어도 업무에 바로 써먹을 수 있었을 텐데,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클린 코드. 읽다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나오면 멈추고 고민하느라 진도가 안 나갔다. 저자의 모든 주장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는 걸, 동의하지 않는 것도 배움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패턴이 보이는가? 완독을 목표로 삼으면, 읽는 과정이 즐거움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의무가 되면 회피한다. 회피하면 죄책감이 생긴다. 죄책감이 쌓이면 책 자체를 멀리하게 된다. "나는 독서 체질이 아닌가 봐"라고 결론짓게 된다. 의지의 문제라고 자책한다. 근데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다.

목차부터 읽는다#

바꾼 방법은 단순하다. 책을 잡으면 목차부터 읽는다. 목차를 5분 동안 찬찬히 본다. 챕터 제목만 봐도 이 책이 뭘 다루는지 대략 보인다. 그 중에서 "지금 내가 궁금한 것"과 관련된 챕터를 먼저 읽는다. 나머지는 건너뛴다.

이게 전부다.

HTTP 완벽 가이드를 다시 이 방법으로 접근했다. 당시 캐싱 관련 이슈를 디버깅하고 있었으니까 캐싱 챕터부터 읽었다. 30페이지. 30분이면 읽혔다. 업무에 바로 적용했다. 그게 이 책에서 내가 필요한 전부였다. 700페이지를 다 읽지 않아도 이 책은 내게 충분한 가치를 줬다.

한 달 뒤에 HTTPS 관련 질문을 받았다. 다시 이 책을 펼쳐서 보안 챕터를 읽었다. 20페이지.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돌아와서 해당 부분을 읽으면, 동기부여도 높고 이해도도 높다. "언젠가 쓸 수 있으니까" 미리 읽는 것보다 "지금 필요하니까" 읽는 게 흡수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금융 칼럼니스트한테서 배운 것#

글을 많이 쓰는 금융 분야 칼럼니스트가 있는데, 이 사람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특징이 있다. 전혀 다른 분야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금융 인사이트로 연결하는 거다. 진화생물학 논문에서 투자 원칙을 뽑아내고, 항공사고 보고서에서 리스크 관리를 설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역사에서 거시경제를 해석한다. 이 사람의 독서 범위가 놀라울 정도로 넓다.

이 사람이 직접 밝힌 건 아니지만, 글을 분석하면서 추론한 게 있다. 이 사람은 아마 각 분야의 책을 "전부" 읽지 않는다. 진화생물학 전공 서적을 1장부터 끝까지 읽지는 않았을 거다. 자기 분야와 관련된 인사이트를 뽑아낼 수 있는 부분만 읽었을 거다. 넓게 읽되, 각 책에서는 선택적으로 읽는 거다.

이걸 개발에 적용하면 이렇다. 개발 서적만 읽지 않는다. 심리학 책을 읽으면서 사용자 행동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고, 경제학 책을 읽으면서 시스템 설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역사 책을 읽으면서 조직 관리에 대한 패턴을 발견한다. 그리고 각 책을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 한 권에서 쓸모 있는 아이디어 하나만 건져도 충분하다.

"한 권에서 아이디어 하나"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게 쌓이면 엄청나다. 한 달에 10권에서 각각 하나씩 건지면, 1년이면 120개의 아이디어다. 한 달에 1권을 끝까지 읽어서 5개의 아이디어를 얻는 것보다 많다.

안 끝내도 된다는 허락#

이 독서법의 심리적 효과가 생각보다 컸다. "안 끝내도 된다"는 허락을 자신에게 주면, 책을 펴는 행위 자체의 부담이 줄어든다.

예전에는 새 책을 시작하는 게 무거웠다. "또 중간에 포기하면 어쩌지"라는 부담감. 그래서 아예 안 시작했다. 시작하지 않으면 포기할 일도 없으니까. 이게 책을 안 읽는 진짜 이유였다. 의지 부족이 아니라 시작의 심리적 마찰이 너무 컸던 거다.

근데 "이 책에서 한 챕터만 읽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면 시작이 가볍다. 30분이면 한 챕터를 읽을 수 있다. 재미있으면 다음 챕터도 읽는다. 재미없으면 덮는다.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이 책은 "실패"가 아니라 "한 챕터만큼의 성공"이다.

이래서 5분 동안 목차만 훑어보고 덮은 책도 실패가 아니다. 이 책이 뭘 다루는지를 파악한 것 자체가 가치다. 나중에 관련 주제가 필요해지면 이 책의 존재를 기억하고 돌아올 수 있다.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의 지도를 그리는 거다.

노트를 적는 이유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노트를 안 적었다. 밑줄을 긋는 정도. 근데 밑줄은 다시 안 본다. 책을 다시 펼치지 않는 한 밑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짧은 노트를 적는다. 읽다가 "이건 쓸모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 문장이나 아이디어를 노션에 한두 줄로 요약한다. 핵심은 원문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라 내 말로 바꿔 적는 거다. "저자가 이렇게 말했다"가 아니라 "이걸 내 프로젝트에 적용하면 이렇게 될 것 같다"로 변환해서 적는다.

이 노트가 쌓이면 나만의 아이디어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책 10권에서 각각 3~5개씩 건진 아이디어가 50개 모이면, 이 50개 사이에서 연결이 보이기 시작한다. 심리학 책에서 본 "인지 부하" 개념이 프론트엔드 UX 설계와 연결되고, 경영 서적에서 본 "단일 책임 원칙"이 코드 아키텍처와 연결되고.

그 서평 블로거가 수백 권의 노트를 공개해둔 이유도 이거였을 거다. 노트를 적는 건 자신을 위한 거다. 3개월 후의 나, 6개월 후의 나, 1년 후의 나를 위한 메모.

통독할 가치가 있는 책은 따로 있다#

모든 책을 이렇게 읽는 건 아니다. 통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 분명히 있다.

실용주의 프로그래머는 목차만 봐서는 안 된다. 앞의 이야기가 뒤의 이야기와 연결되고,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 있다. 이런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맥락이 산다.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 레퍼런스 성격의 책(사전, 가이드, 카탈로그)은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는다. 내러티브 성격의 책(철학, 마인드셋, 에세이)은 처음부터 읽는다. 전자는 "찾아보는" 책이고 후자는 "경험하는" 책이다.

기술 서적 중에서도 이 구분이 적용된다. 리팩터링은 레퍼런스다. 카탈로그를 필요할 때 펼치면 된다. 디자인 패턴도 마찬가지다. 반면 소프트웨어 장인은 내러티브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저자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이 구분을 하는 것만으로도 책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줄었다. 700페이지짜리 레퍼런스 책을 사놓고 "언제 다 읽지"가 아니라, "필요한 3개 챕터를 읽자"가 되니까.

10개월 후의 기록#

독서법을 바꾼 지 10개월. 결과를 정리해봤다.

이전 1년: 완독한 책 0권. 중간에 포기한 책 6권. 읽은 총 페이지 수 약 500페이지.

이후 10개월: 완독한 책 4권(내러티브 성격). 부분 읽기한 책 14권(레퍼런스 성격). 노트를 적은 아이디어 약 80개. 읽은 총 페이지 수 약 2,400페이지.

수치로 보면 약 5배.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노트 80개다. 이전에는 0개였다.

코드 리뷰에서 하는 말의 질이 달라졌다. "이 변수명 좀 바꾸면 좋겠어요" 수준에서 "이거 리팩터링 책에 나오는 패턴인데, 조건문 대신 다형성을 쓰면 분기가 줄어들 것 같아요" 수준으로. 근거 있는 제안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근거는 책 한 권을 완독해서 얻은 게 아니라, 여러 책에서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어서 쌓은 거다.

완독은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읽은 것에서 가치를 뽑아내는 거다. 한 줄을 읽고 한 가지를 바꾸면 그게 성공적인 독서다. 300페이지를 읽고 아무것도 안 바뀌면 그건 시간을 쓴 거지 독서를 한 게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방식으로 읽기 시작하면서 서점에 가는 게 부담이 아니라 즐거워졌다. 예전에는 서점에 가면 "또 안 읽을 책을 사겠지"라는 죄책감이 있었다. 지금은 목차를 훑어보고, 관심 가는 챕터를 서서 10분 읽어보고, 살지 말지 결정한다. 사더라도 "이 책의 4장과 7장을 읽을 거다"라는 구체적인 목적이 있으니까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쓸 확률이 줄었다. 책이 도구가 됐다. 전시품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