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앱을 바꾼 횟수가 7번이다. 2년 동안 7번. 평균 3~4개월에 한 번씩 새 앱으로 갈아탄 셈이다. 매번 마이그레이션할 때마다 이전 앱의 메모를 새 앱으로 옮기는 데 반나절을 썼다. 그 시간에 메모를 50개는 더 쓸 수 있었을 거다.
에버노트 → 노션 → Bear → 옵시디언 → Apple 메모 → 다시 노션 → 다시 옵시디언. 매번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메모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시작했고, 매번 "이 앱은 이게 불편해"라면서 다른 걸로 넘어갔다. 새 앱의 랜딩 페이지는 항상 매력적이었고, 기존 앱은 항상 뭔가 부족해 보였다.
돌이켜보면, 도구를 바꿔도 해결이 안 됐던 건 문제가 도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모 유목민의 역사
에버노트는 입사 전부터 썼다. 대학교 다닐 때 수업 노트용으로 쓰다가 개발을 시작하면서 기술 메모도 여기에 넣었다. 코드 스니펫, 에러 해결법, 블로그에서 본 좋은 글 스크랩. 문제는 메모가 500개를 넘어가면서 시작됐다. 검색이 느리다. 원하는 메모를 찾으려면 키워드를 정확히 기억해야 하는데, 3개월 전에 적은 메모의 키워드를 누가 기억하나. 그리고 에버노트의 에디터가 개발자 친화적이지 않았다. 코드를 넣으면 포매팅이 깨졌다. 인라인 코드조차 제대로 안 됐다.
노션으로 옮긴 건 2024년 초. 주변에서 다들 쓰길래 따라갔다. 트위터에서 "나의 노션 워크스페이스" 같은 글이 유행했고, 예쁘게 정리된 노션 화면 캡처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해야지" 했다. 데이터베이스 기능이 좋아서 처음에는 감동했다. 기술 노트를 태그별로 분류하고, 프로젝트별 페이지를 만들고, 칸반 보드로 학습 진도를 관리했다. 셋업하는 데만 주말을 통째로 썼다. 아이콘도 골라 넣고, 커버 이미지도 넣고, 토글과 콜아웃을 활용한 템플릿도 만들었다.
2주 후에 메모를 안 하고 있었다. 이유가 웃긴데, 메모를 하려면 어떤 데이터베이스에 넣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는 거다. "이 메모는 TIL 데이터베이스에 넣어야 하나, 프로젝트 노트 데이터베이스에 넣어야 하나, 기술 참고자료 데이터베이스에 넣어야 하나. 아니면 새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야 하나." 분류 체계가 너무 세밀해서 메모하는 것 자체에 마찰이 생겼다. 분류하는 데 드는 인지 비용이 메모하는 비용을 초과했다. 메모의 목적은 생각을 빠르게 기록하는 건데, 기록하기 전에 5분을 고민해야 하면 그건 시스템이 잘못된 거다.
Bear는 가볍고 마크다운 지원이 좋아서 좋았는데 윈도우에서 안 돼서 회사 노트북(맥)과 개인 PC(당시 윈도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쓰기 불편했다. 옵시디언은 로컬 기반이라 빠르고 좋았지만, 처음에 너무 많은 플러그인을 깔아서 커스터마이징 지옥에 빠졌다. 메모하는 시간보다 플러그인 설정을 만지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 플러그인이 좋대" "이 CSS 스니펫을 적용하면 예뻐져" 하면서 결국 메모 앱을 만지는 게 취미가 됐다. 본말전도.
Apple 메모는 극단적으로 심플한 걸 시도해본 거였다. 실제로 마찰은 제로에 가까웠다. 아이폰에서 바로 열어서 적으면 된다. 근데 검색이 빈약하고 마크다운 지원이 없어서 코드 조각을 넣기가 불편했다. 개발자 메모에 코드가 빠지면 가치가 반감된다.
깨달음: 시스템이 아니라 규칙이 문제다
7번째로 옵시디언에 정착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매번 실패한 이유가 앱의 기능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규칙을 안 정한 채로 쓰기 시작해서 그렇다는 거다.
노션에서 실패한 건 노션이 나빠서가 아니라, 분류 체계를 너무 복잡하게 만든 내 탓이었다. 옵시디언에서 실패한 건 옵시디언이 나빠서가 아니라, 플러그인을 20개 설치한 내 탓이었다. Apple 메모에서 불편했던 것도, 코드를 적을 방법을 미리 정하지 않은 내 탓이었다.
도구는 뭐든 상관없다. 노션이든 옵시디언이든 Bear든 Apple 메모든, 중요한 건 "메모를 넣을 때 고민이 없어야 한다"는 거다. 열고, 적고, 닫는다. 이 세 단계에서 2번째 이외의 마찰이 있으면 안 된다.
지금 쓰는 시스템
옵시디언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규칙을 먼저 정했다. 앱을 열기 전에 노트에 규칙을 적었다.
규칙 1: 폴더는 3개만. inbox, notes, archive. 새 메모는 무조건 inbox에 넣는다. 분류 고민 없이. "이거 어디에 넣지?"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보통 일요일 저녁에 inbox를 정리해서 notes로 옮기거나 archive로 보낸다. 그때 태그를 달고 제목을 정리한다. 적을 때가 아니라 정리할 때 분류한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규칙 2: 플러그인은 5개 이하. 지금 쓰는 건 Calendar, Dataview, Templater, Quick Add 이 네 개. 다섯 번째 자리는 비워두고 있다. 새 플러그인을 설치하고 싶으면 기존 걸 하나 삭제해야 한다. 이 규칙이 없으면 한 달 안에 플러그인이 20개가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규칙 3: 메모 하나의 길이 제한 없음. 이전에는 "메모는 짧고 원자적이어야 한다"는 Zettelkasten 원칙에 집착했는데, 그러면 메모하기가 부담스럽다. "이 메모가 충분히 원자적인가?"를 고민하느라 메모를 안 하게 된다. 두 줄짜리 메모도, 열 줄짜리 메모도, 몇 페이지짜리 메모도 다 괜찮다. 길이를 신경 쓰지 않으니까 메모의 양이 늘었다. 대충 적어도 된다.
규칙 4: 하루 끝에 한 개 이상. 오늘 배운 것, 삽질한 것, 떠오른 아이디어, 읽은 글에서 인상 깊었던 점. 뭐라도 하나 적는다. 없으면 "오늘은 특별한 거 없었음"이라고 적는다. 적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빈 날이 하루, 이틀 생기면 습관이 끊기니까.
메모가 실제로 도움이 된 순간들
시스템이 자리잡고 3개월 정도 지나니까 메모의 가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은 프로덕션에서 이미지 최적화 관련 이슈가 터졌다. 상품 리스트 페이지에서 Largest Contentful Paint가 3초를 넘기고 있었다. 예전에 비슷한 문제를 겪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있었는데, 옵시디언을 검색하니까 4개월 전에 적어둔 메모가 나왔다. "next/image에서 layout=fill 쓸 때 부모 컨테이너에 position: relative 없으면 레이아웃 깨짐. sizes 속성 안 넣으면 불필요하게 큰 이미지 로드. priority 속성을 Above the fold 이미지에만 넣기."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도와준 거다. 그 메모 덕분에 30분이면 끝날 일을 반나절 삽질할 뻔했다.
코드 리뷰에서도 도움이 된다. 팀원이 올린 PR에서 특정 패턴을 봤을 때, "이 패턴에 대해 뭔가 적어놨었는데" 하고 검색하면 기술 서적에서 발췌한 메모가 나온다. "클린 코드 p.35: 함수는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 한 가지 일을 잘 해야 한다. 그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 이런 메모가 있으면 근거 있는 리뷰 코멘트를 달 수 있다.
그리고 1on1이나 성과 리뷰 때. 2년간 업무에서 겪은 문제와 해결 과정이 메모에 남아있으니까, "이번 분기에 뭘 했는지" 정리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메모가 없으면 한 달 전에 뭘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사람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된다.
종이의 역할
디지털 메모만 쓰는 건 아니다. 회의할 때는 종이 노트를 쓴다.
회의 중에 노트북을 열면 타자 소리가 거슬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회의하다 말고 슬랙 확인하게 되는 것도 문제다. "잠깐 메모하는 중이에요"라고 하면서 실은 슬랙 DM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종이에 적으면 이런 유혹이 없다. 펜과 종이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그릴 때 종이가 훨씬 자유롭다. 컴포넌트 구조를 박스로 그리고, 데이터 흐름을 화살표로 표시하고, 옆에 메모를 덧붙이고. 이걸 노션이나 옵시디언에서 하려면 시간이 세 배는 걸린다. 물론 필기가 예쁘진 않다. 나중에 못 읽는 경우도 있다. 내 글씨는 악필에 가깝다.
그래서 규칙을 하나 더 만들었다. 회의 끝나고 5분 안에 종이 노트를 사진 찍어서 옵시디언 inbox에 넣고, 핵심 내용만 3~5줄로 타이핑 정리한다. 5분 안에 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자기 필기를 해독 못하기 때문이다. 진짜로 다음 날에 보면 "이 동그라미 안에 적은 건 뭐지?"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지금 시스템도 완벽하지 않다. 일주일에 한 번 inbox를 정리한다고 했는데, 바쁘면 2주, 3주 밀리기도 한다. inbox에 메모가 40개쯤 쌓이면 정리하기 싫어서 또 방치하게 된다. 이러면 inbox가 쓰레기통이 되는데, 그래도 안 적는 것보다는 낫다.
태그 체계도 아직 완벽하지 않다. 처음에 태그를 10개 정도 만들었는데, 6개월 지나니까 어떤 태그에 메모가 80개고 어떤 태그에는 2개다. 재분류를 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미루고 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훨씬 낫다. 메모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줄었고, 실제로 과거의 메모가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하니까 메모하는 게 습관이 됐다. 도구보다 규칙, 규칙보다 습관이 중요하다는 걸 7번의 실패 끝에 배웠다.
아직도 "이 앱 좋다더라" 하는 글을 보면 마음이 흔들린다. 지난주에도 Craft라는 앱 리뷰를 봤다. 깔끔하고 예뻤다. 손가락이 앱스토어로 향했는데, 참았다. 이번에는 참았다.
